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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돌보기 노하우

‘할비는 이제 가도 돼, 아빠가 왔쟎아‘ (3. 손주배신에 대비하기)

by 바이오스토리 2021. 6. 8.

손주 돌보기 노하우(3): 손주배신에 대비하라

할머니를 잊은 것 같다고 서운해마라. 아이들 탓이 아니다. 그리고 그 포근함은 묵시적 기억으로 남아있다.


‘할비는 이제 가도 돼, 아빠가 왔쟎아‘

4살 손자 준현의 말이다. 제대로 배신 때리는 소리다. 오후 내내 같이 놀아주느라 기진맥진할 때 나온 소리라 그 충격이 더하다.  ‘그래, 손자 놈에게 할아버지란 존재는 제 엄마 아빠 없을 때 대신 놀아주는 대타지. 나만 모르고 있던거네’. 아니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귀로 확인하고 나니 더 맥이 빠지는 거다.

손자 재롱을 보는 맛은 꿀이다. 수백 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 꿀이지만 그 꿀이 떨어지면 어떨까. 다 큰 아들딸들이 떠가난 빈 둥지를 망연자실 쳐다보는 부모보다 더 할까 덜 할까. 꿀의 맛으로 비교해보자. 아들딸은 꿀맛이 혀에 아리다. 직접 부딪히고 속 썩이고 마음 졸였으니 온몸에 멍으로 기억들이 남는다. 반면 손주들은 한 단계 건너서다. 한결 여유롭다. 게다가 이미 자식들을 한번 겪어본 터다. 이런 손주들의 꿀맛은 뒤끝이 없을까. 아니다. 뒤끝이 더 아릴 것이다. 골이 깊을수록 그늘도 짙다고 했다. 손주들은 천연꿀맛, 그 중에서도 최상품인데 그 꿀이 떨어지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약 떨어진 아편환자처럼 속이 타들어갈까.

이런 떨떠름한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린다. 있는 것 자체가 고마운 놈들이지 무슨 떡을 바라고 봐주는 건가. 제대로 자라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 아닌가. 맞다, 나도 안다. 큰 탈 없이 자라서 학교 다니고 성인 되는 것만 해도 엎드려 절 할 입장이란 것도 안다. 그래도 배신 때리는 손자 말 한마디는 새벽의 찬 공기처럼 정신 차리게 한다. 앞날을 미리 알고 배신당해도 견딜 수 있도록 단단히 먹고 있으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옛말에도 있었다. ‘애본 공은 없다’고. 이 말을 생각나게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P선생은 지방에서 아들부부와 같이 지내고 있다. 몇 십 년을 살던 서울 집을 정리하고 지방의 아들부부 근처아파트로 이사할지도 모른다 했다. 그 지방에는 아들 직장과 아들 처갓집이 있다. 주위에선 의견이 반반이었다. 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방에 가느냐, 아들은 장가가면 다른 나라 국민으로 생각해라, 연금으로 충분히 살터인데 차라리 실버타운에 가라 등 아들부부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반면 그래도 아들이 곁에 있는 게 말년에는 필요하다, 급하면 의지할 곳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등 아들 곁에 가는 걸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의견이 갈린 가운데 P 선생부부는 아들 곁을 택했다. 20년 전, 처음 지방에 있는 P선생 집을 방문했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손자 사진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인다. 

P선생은 손자이야기부터 꺼낸다. P선생 책상에는 또 다른 사진이 있다. 별이 달린 군복, 허리에 찬 칼, 그리고 손에 든 지휘봉은 평생을 군에 바친 P 선생의 세월이 묻어있었다. 손자가 할아버지 지휘봉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P선생은 싱글벙글 이다. 군에서 보던 장군으로서의 엄격함은 손자 덕분에 모두 녹아버린 듯했다. 그런 P선생을 다시 방문한 건 세월이 꽤 지나서다. 그 사이 부인은 지병으로 먼저 돌아가셨다. 

두 손자는 이미 다 큰 청년이 되어 있었다. 큰 손자는 유럽에 가 있다. 작은 손자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서인지 할아버지를 만나본지가 꽤 오래다. 지휘봉을 들고 놀던 두 손자는 이미 청년들이 되어 버린 거다. 나이와 함께 할아버지와의 거리도 생겼다. P선생은 전과 달리 말이 줄어 있었다. 책상에는 또 다른 모습의 큰 손자사진이 있다. 국방색 알록달록한 군복이 눈에 생소하다. 외국군복이다. 일부러 손자 근황을 물어본다. 잘 지내고 있다는 말 속에 서운함이 묻어 나온다. 

“큰 녀석은 할아버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큰 손자가 지구반대편에 있는 만큼 통하기도 힘들다 했다. 시간 차, 거리 차, 그리고 세대 차이를 넘어서기에는 P선생은 이미 팔순이다. 

“어린 손자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했으니 지금처럼 잘 컷지요. 그 애들이 말은 안 해도 가슴 한 구석에는 할아버지 품안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를 좋아했던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예요” 

P선생은 조금 고개를 끄덕인다.

“저 손자, 외국 가서 군인이 되었네요?”
 
“글쎄, 외국인이라 의무복무도 아닌데 굳이 군 생활을 하겠다고 그러네”

사진 속 손자 모습은 P 선생을 많이 닮았다.

“그것 보세요. 그 녀석이 어릴 때 말 했다면서요. 나는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제일 멋있어요. 그러니까 외국인데도 일부러 군대 가서 저렇게 군복을 입었잖아요. 그 녀석에게 할아버지는 가슴에 콕 박혀있어요”

그제야 P선생이 조금 미소를 짓는다.

자식사랑은 일방통행 도로, 손주사랑은 일방통행 고속도로다. 손주들은 성장하면서 조부모를 떠난다. 하지만 두뇌 깊숙한 곳에는 남아 있을 것이다(박스기사). 할아버지, 할머니와 즐겁게 놀았던 기억, 그게 평생의 든든한 디딤목이 될 것이다.

 

(2021.06.15)

애본 공 없다고 서운해하지 마라. 아이들 기억은 성장하면서 희미해지지만 깊은 속에는 남아있다

 




유아기억상실(4살 이하 기억은 없다. 이후 서서히 모든 걸 기억한다)

 

(깊은 상식): 어릴적 할머니 고생을 기억못하는 건 아이들 두뇌 재편성 때문이다.

어릴 적 기억은 완벽하게 저장되지 않는다. 유아 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이다. 미국 에모리 대학연구진이 3살 때 일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조사했다(1). 7세는 60%이상 기억한다. 하지만 8-9세가 되면 40% 이하다. 왜 그 시기에 그렇게 급감할까. 답은 두뇌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서 두뇌 기억담당 뉴런세포가 새로이, 많이 생겨나기 때문이다(2). 기억은 여럿이 함께 형성되어야 튼튼히 저장된다. 특히 언어, 인지기능이 함께 제대로 작동해야 강하게 기억회로를 형성한다. 즉 할아버지와 놀던 것을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가 주어져야 기억이 확고히 저장된다. 하지만 3-4살은 언어, 인지기능이 어른과 달리 미숙하다. 그래서 기억이 일단 만들어지는 한다. 2021 예일대 연구결과다 (3), 하지만 그런 기억들이 어른들 기억처럼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즉, 기억이 채 자리를 잡기 전에 새로이 성장하는 기억세포들이 덮여지면서 3-4세 기억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럼 완벽히 없어지는 건가. 아니다. 다른 연구들에 의하면 영유아기 때 스트레스는 어떤 식으로든 두뇌에 흔적을 남긴다. 즉 기억되어 있다는 거다. 다만 어릴 적 기억은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 ‘묵시적 기억’상태로 저장된다는 거다. 그래서 유아기의 학대, 공포 혹은 반대로 즐겁고 따뜻했던 기억은 무의식상태로 머릿속 깊이 박혀있다는 거다. 이게 평생 동안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 할비, 할미들이여. 어릴 적 열심히 돌봐주고 놀아준 걸 손주들이 기억 못한다 해도 배신 때렸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손주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어릴 적 기억이 사라지는 거다. 배신을 덜 맞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바로 손주들 언어, 인지 기능을 높이는 거다. 즉 말을 빨리 배우고 머리가 잘 발달되도록 하면 그때 기억이 훨씬 강해진다. 또 하나 있다. 기억이 강하게 되도록 손주에게 더 집중하는 거다. 건성건성 급하게 답해주는 부모와 달리, 아이스스로 이해해서 기억하도록, 조근조근, 여러 번,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거다. 그러면 할비, 할미와 즐겁게 놀던 기억이 더 오래갈 것이다. 손주들 발달이 빨라지고 또한 배신 맞을 확률이 줄어들고, 일석이조다. 이제 손주들 머리가 잘 돌아가게 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기억종류에 따라 두뇌에 저장되는 곳이 다르다

사진: (기억종류와 두뇌)저장장소

(1)명시적기억: 나에게 일어난 사건, 일반 정보 등 : 대뇌피질. 편도체(보통의 기억)
(2)묵시적기억: 자전거타기 등의 몸 기억: 소뇌와 대뇌기저핵 (평상시는 생각이 안나도 깊은 곳에 기억되어 있다)(유아기억이 사라진다해도 일부는 깊숙히 남아있다)
(3)현재 일시적 기억: 전두엽


(관련논문:(1)The onset of childhood amnesia in childhood: a prospective investigation of the course and determinants of forgetting of early-life events’ https://pubmed.ncbi.nlm.nih.gov/24236647/
(2)http://learnmem.cshlp.org/content/19/9/423/F1.expansion.html
(3)Evidence of hippocampal learning in human infants. Current Biology, 2021; 
DOI: 10.1016/j.cub.2021.04.072

 

 

 

(사진설명)